@somespringday의 트위터 : 2011년 01월 31일

  • 사랑하는 룸메 김승권이 새해 선물로 머니클립을 주었다. 고맙고 자랑스럽다. 근데 절대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안된다. http://instagr.am/p/BUFoC/ 1-31 23:57 #
  • @zenanaroom ㅋㅋ 혼자 갈땐 사람 많은데도 괜찮지않아? 사람구경도 하고 ㅋ 1-31 20:4 #
  • 으하하 커피숍 bgm이 지난주와 똑같다. 잉여를 벗어나보려 왔는데 왠지 더 잉여가 된 기분..ㅠㅠ 1-31 19:42 #
  • 잉여짓하던 남자 혼자 마시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라떼.. 아메리카노로 시킬걸.. @ 커피쿨러 http://instagr.am/p/BT45d/ 1-31 19:41 #
  • 잉여짓의 끝은 늘 흙서점과 커피쿨러로.. 를 쓰다가 실수로 눌러버렸네. “@somespringday: 월요일 (@ 커피 쿨러) http://4sq.com/fM3lnt” 1-31 19:36 #
  • 월요일 (@ 커피 쿨러) http://4sq.com/fM3lnt 1-31 19:34 #
  • @meenari 아이구. 듣던중 반가운 멘션 ㅋ 1-31 19:32 #
  • @funnywave84 휴관 아니래봐야 혼자 그런데 다니는 남자는 아님. 내가 혼자 가는 곳은 그저 커피숍 ㅋ 1-31 19:32 #
  • 아 그저 월요일이란 이렇게 뒹굴대며 앉아 잉여짓이나 하는 날인가... 1-31 18:28 #

@somespringday의 트위터 : 2011년 01월 30일

  •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에는, 정말 나의 진심을 담아서 알찬 이야기 해야 하는거라 생각하고 진심을 갈고닥기 위해 늘 노력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내 진심 따위보다는 상대가 듣고 싶은 말 한마디가 중요한거였나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1-30 22:32 #
  • 오늘부터 http://T2B.kr 을 이용해서 제 트윗들을 블로그로 보내기로 했어요. #T2B 1-30 21:13 #

T2B.kr 테스트입니다.

이 글은 T2B.kr에서 블로그 등록을 위해 보낸 테스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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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동성애 차별 금지법에 대한 단상

동성애 차별 금지법 이야기가 주위에서 들리는 것을 보고 동성애에 대한 내 입장을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책도 좀 뒤적여보며 오랜만에 제법 긴 분량의 레포트를 쓰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은 손가락 부상을 만나 며칠을 쉬었다. 며칠 쉬고 보니 써놓은게 참 쓸데없기도 하고 너무 잘난척 하려 한 것 같아서 다 지워버리고 그냥 생각나는 것만 두 손가락만을 사용해 정리 해 보았다. 

1. 일단 동성애는 생각보다 덜 심각한(혹은 추악한, 솔직히는 변태적인) 사안이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부정적 효과 보다는 긍정적 효과도 많은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만나본적이 없지만 커밍아웃한 사람은 주위의 시선만 아니면 심리적으로 더 안정을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얼마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나는 동성애자를 미워했었다"는 글을 보고 더 그런 생각을 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죄'니까 그들을 계몽, 교정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주장들은 차근차근 보면 타당성이 별로 없다.

일단 성경적으로 동성애가 죄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다. 나는 사실 주석적으로 명백하게 '죄목록'을 찾는 시도는 모두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느끼는데, 누군가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그 죄목록을 줬으면 좋겠다. 나는 바로 그를 21세기 바리새인으로 부를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잘잘못을 분별해주는 기준이 되는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무슨 법전과 판례집마냥 죄와 의의 여부를 판결해주는 책은 절대 아니다.

심지어 명백히 죄라고 하더라도 그러면 동성애 뿐 아니라 기독교는 살인, 자연파괴, 사회적 불의, 우상숭배, 부정축재의 문제에 더 심각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건 주석적으로 접근 가능하다. 주석적으로 성경에서 죄 목록을 뽑는다면 동성애는 매우 하위의 죄에 해당할 것이다. 성경에 얼마 안나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성적 취향과 프라이버시급에 해당하는 윤리적 행위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짐월리스가 말하기를 동성애는 대여섯번, 가난에 대해서는 2000번 성경에 언급된다고 한다. 게임 끝 아닌가? 최근의 동성애 차별 금지법안 반대는 기독교의 공포증이거나, 괜한 세과시, 이도저도 아니면 뻘짓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3. 사실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데는 성경적 근거보다 공포증, 혹은 혐오증이 더 작용하는 것 같다. 성추행, 폭행, 혼외정사까지 온갖 성범죄는 다 저지른 목사'들'보다 아무 잘못도 안하고 혼자서 맘 졸이는 동성애자 '한'사람 몰아 붙이는 꼴을 보면 확실회 이건 공포증이다. 솔직히 자기 안에 있는 성적 추악함 때문에 이성애적인 성범죄는 쉽게 용서가 되는 것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자기는 취향 없으니 그저 정죄만 하면 되고, 그럼으로서 자기의 성적 순결이 담보되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요즘 동성애 차별 금지법 반대자들을 보면 이 법 통과되면 목사들 다 잡혀간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도 꼴불견이다. 동성애자들은 허리케인의 원흉이니 나라말아먹니 온갖 막말을 들어도 상관없고 자기들 목사는 하고 싶은대로 지껄이게 둬야 한단 말인가? 소외된 소수자 한사람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식구만 챙기려는 지극히 이기적 생각이다.

4. 동성애는 확실히 교정가능하다고 말하며, 그렇기에 죄로 정죄하고 교정해야 한다는 논리도 보았다. 특히 과거 동성애적 취향을 교정한 사람들이 정 반대로 돌변해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교정 시도하는 것을 보면 참 무섭다. 단도직입적으로 장애도 선천성과 후천성, 치료가능과 불치가 있는데 동성애라고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이 눈 먼 것이 '누구의 죄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누구 죄냐를 따지지 말고 지금 이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고 하신다. 여기서 동성애 '교정'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신묘하게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의 영광'이다. 만일 백발 양보해 동성애자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가리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지막 날, 새 창조의 날에 완전해 질 것이지 지금부터 당장 완전해 질 수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은 원죄와 고범죄, 즉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죄로 인해 누더기가 된 상태인데 누가 우리 죄인인 사람을 향해 "너 빨리 잘못의 근원을 찾아 교정하고 깨끗해져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요컨대, 동성애를 고칠 수 있을지 없을지, 선천인지 후천인지는 모르지만 그걸 따지는건 별 영양가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러나 조금 손상된, 그렇지만 곧 회복될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5. 이렇게 썼지만 개인적으론 동성애자를 만난다면 난 느리게나마 교정을 시도해 보려 할 것 같다. 이유는 두가지다. 
1) 변태적 성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동성애를 선택적으로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물에도 동성애물이 있는걸 보면 분명히 이런 변태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동성애에 대한 관용이 적용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 
2) 다음은 지극히 단순한데, 내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관용이니 이해니 자유니 생각해보지만, 관념을 넘어 실제로 내가 '그들'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면, 많은 대화와 심지어 의견충돌이 있기 전까진 쉽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3)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동성애 반대론자 정도 될거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도우파 정도?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동성애가 죄라고 핏대 세우며 외치는 사람들, 동성애 차별 금지법안 통과되면 교회가 망할거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딱 질색이다. 죄를 정죄하는게 절대 상대에게 좋은게 아니라는 사실은 다 알지 않나? 게다가 교회는 이미 당신들이 다 말아 먹었잖아.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지난주간 명동에서 “지식 수련회”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청어람, 인성모, 카이로스라는 세 단체가 주최한 하드코어 세미나 수련회 선물세트라고나 할까요? 저도 듣고 싶은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어 아쉬웠고, 덕분에 좀 더 분주해져 고달팠지만 평소 손이 잘 가지 않던 책을 뒤적이며 때로는 갸우뚱거리고, 때로는 무릎을 쳤습니다. 하루 두시간씩 꼬박꼬박 명동에 나가 공부하면서, 그리고 혼자 방에 엎드려 책을 보면서 저는 일상적이지 않은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는 따위의 고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미나라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시간에 제가 느낀 행복은 지적 쾌감이라기 보다는 변화를 모색하는 설레임이었습니다. 톰라이트라는 패기만만한 학자는 기존의 신학자들이 공들여 쌓아온 신학 작업들을 서슴없이 비판하면서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이라는 민감하고도 신비로운 실체를 찾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범인이 보기엔 무모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 연구가 일련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의 설교와 묵상도 좋아했었던 저는 그의 아카데믹한 작업이 기대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무모한 진리 추구가 과연 어디에까지 가 닿을지가 궁금했습니다. 이런 걸음으로 캐낸 진리 앞에서 우리 신앙은 얼마나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을지, 그 설레는 기대로 저는 행복했습니다. 

또 요즘 저를 즐겁게하는 소일거리 하나는 드라마 “연애시대” 입니다. 오래된, 게다가 약간은 뻔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드라마를 이제와서 들춰보는 이유는 한가지, 주인공 은호의 아빠가 은호에게 “은호야 행복해져라!”고 응원하는 말이 제 마음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보다보니 연애시대는 참 타이밍 못맞추는, 그래서 자기의 사랑과 행복을 제때 찾지 못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더군요. 그래서 주제가 가사도 이렇습니다. “우리 지금 더 행복했을까” 짧은 저의 기억들도 돌아보며 과연 내가 언제 어떤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더 행복했을지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면 뭐합니까. 현재의 행복은 현재의 행복이니 오늘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해 질 수 있겠지요. 저는 그래서 이제 밀쳐놨던 두꺼운 책들을 꺼내 당분간 공부를 좀 열심히 하며 진리로 인한 변화를 좀 모색해보려 합니다. 또 드라마도 열심히 보며 로맨틱한 감정의 행복도 느껴보려 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행복한 일은 무엇일까요? 한번 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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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편지 1 - 춤추는 숲, 꿈꾸는 물결  (0) 2010.05.03

얼마나 더

7월들어 목사님이 안식년을 가시고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한편으로 기대한 일이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매주 설교하려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예전 매주 설교하던 시절에는 스스로의 한계를 나름대로 설정하고 내 할 일은 공부와 설교라고 정해놓았기에 매주 의무적으로, 한편으로는 일상적으로 설교준비에 매진했지만, 설교보다 사람을 돌보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다보니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 게다가 전임으로 일하고, 또 돌볼 사람도 많아지다보니 마음이 분주해지고 설교 작성에 집중하기가 영 쉽지가 않다.

게다가 요즘 청년들의 고민이 얼마나 치열하고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그 고민들을 설교에 담아내려니 설교 할 때마다 늘 밤을 새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한편으로는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나름의 답을 풀어낸다고 애써보지만 영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쓰고 지우다보면 금새 밤을 지새게 된다. 잠 못드는 청춘의 고뇌려니 하고 스스로 만족하려 하지만 피곤한건 사실이다.

밤새 설교 쓰다가 이 노래를 들었다. 안치환의 처연한 목소리와 하모니카 소리가 반가웠다. 힘있는 선배들의 설교를 들으며 좋긴 하지만 왜 우리 20대 청춘들은 저 답에 이르지 못할까 생각하는 내게 "얼마나 더 기다려야"라는 가사는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고민을 했겠지만 포기해버리고 타협해버린 슬픈 선배들의 현실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할것 같다는 두려움도 느껴졌다. 밤새 설교 쓰면서 지친 내 친구들과 혹독한 시대, 그리고 모자란 내 모습을 고민하던 내 불쌍한 신세를 이 노래 속에서 느꼈다면 너무 오버일까?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얼마나 더 많은 밤을 지새워야 할까.
얼마나 더 눈물 흘리며 삶의 고통에 치를 떨어야 할까.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건
얼마가 걸리든 걷다보면 저 푯대에 다다르긴 할까
숱한 밤을 지샌다한들 답을 얻을 수 있기는 할까
이렇게 애쓰고 발버둥쳐도 세상이, 사람들이, 아니 내 삶이 바뀌긴 할까 하는 마음.

이렇게 고민하고 고민하며 새파란 젊은 전도사 시절이 간다.


얼마나 더
송봉주 글,곡
 
해지는 저녁 창에 기대어 먼 하늘 바라보니
나 어릴적에 꿈을 꾸었던 내 모습은 어디에
가슴 가득 아쉬움으로 세월속에 묻어두면 그만인 것을

얼마나 더 눈물 흘려야 그 많은 날들을 잊을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내가 선 이곳을
사랑할 수 있을까..

세월이 흘러 내 모습 변해도 아름다울 수 있는
서툰 발걸음 걸을 수 있는 그런 내가 됐으면..

가슴 가득 그리움으로 세월 속에 묻어두면 그만인 것을
얼마나 더 눈물 흘려야 이 먼길의 끝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걸어가야 그 많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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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이야기  (1) 2010.04.29
때에 관해서  (0) 2010.04.28

내가 꿈꾸는 교회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하는 질문이 있다면, “과연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 되는 것인지 요즘은 길가다 교회만 보아도 저 교회는 과연 좋은 교회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불신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최근 아프간 사태 덕분에 더욱 악화된 것 같습니다. 옛 친구들을 만나서 전도사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면 농담을 가장해 슬금슬금 내뱉는 이야기들이 참 만만치 않은 현실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 심각한 불신의 벽을 뚫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좋은 교회, 좋은 성도의 모범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과연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한국 교회들이 원하고 있는 좋은 교회의 모델들을 가만히 보면 “과연 저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마치 하나의 대형 마트를 운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큰 건물을 짓고, 많은 사람을 모으고, 심지어 체인점을 내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들이 몇 있습니다. 전혀 희망적이지 못한 이 물질 만능의 세상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할텐데 교회역시 똑같은 물질 만능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자기를 키워준 모교회가 갈수록 너무 커져가는게 두렵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생각납니다.

(구세주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커피하우스 겸 서점 Potter's house http://www.pottershousedc.org/)

미국 워싱턴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구세주의 교회(Church of the Saviour)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해 하고 있는 사역은 70개가 넘고, 이에 들어가는 예산도 연간 1000만달러, 우리돈으로 100억이 넘는 규모입니다. 교회가 하고 있는 사역들을 보면 저소득층의 교육과 아파트 임대, 노숙자들의 주거, 알콜/마약중독자들의 치료를 비롯하여 교육과 직업소개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교회가 꼭 해야할 일들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사역들을 하고 있지만, 정작 창립한지 60년이 넘은 이 교회의 성도는 150명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고든 코스비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큰 규모는 실제로 효과를 반감시키며 이것은 실로 반문화적이서 깊이를 가지고 문화로의 중독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세이비어교회는 숫자를 통해서 오는 힘의 유혹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찬미자가 된다는 것은 추종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이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도 우리 교회의 문화적인 양식에 들어오는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합니다.”


제한된 지면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구세주의 교회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세상을 섬기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물리적인 힘을 얻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힘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교회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꿈을 꾸셨던 것처럼, 완전히 헌신되고 고도로 훈련된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와 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 커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데 제 꿈은 참으로 작은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겉보기는 작고 초라하더라도 그 속이 알찬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교회는 보기에 좋은 교회, 다니기에 좋은 교회, 남들에게 자랑하기에 좋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좋은 것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교회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은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호계교회 희년 기념 신문 기고문, 2007.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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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마을 교회 소개  (0) 2010.05.03

꿈꾸는 편지 1 - 춤추는 숲, 꿈꾸는 물결

군대생활 중에 가장 힘든 일은 보초였습니다. 하지만 “유류고”라고 하는 보초지만은 제게 즐거운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선 사방이 깜깜한 밤에도 건너편 동산 숲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어둔 하늘과 분명히 구분되는 깜깜한 숲이 일렁이듯 춤을 추어 고단한 군인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대낮처럼 잎사귀 하나, 가지 하나가 바람에 스치는 모양새는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숲이 일렁이는 춤사위만은 밤에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한강에 나가서 강물을 오래 쳐다본 적이 있었습니다. 버거울 정도로 불어난 강물 탓에 무거워 보였지만, 엎치락뒤치락 흐르는 강물은 설레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후덥지근하던 제 마음도 시원해졌습니다. 산골짜기에서부터 물결이 품어온 넓은 꿈이 이제 곧 넓은 바다에 닿아 이루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습니다.

한 해를 맞으며 제 마음이 다시 그 동산의 숲처럼, 불어난 강물처럼 일렁이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마을에 돌아와 지난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같이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꿈같이 어려운 일들이 많았고, 불평과 불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공동체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에 설레었습니다. 깜깜한 절망의 세대이지만, 우리가 꿈꾸고 춤출 때 새로운 희망의 세대를 열어갈 수 있다는 믿음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올 한해 그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에 저는 가슴이 뜁니다.

제가 연초라고 너무 거창한 말만 늘어놓고 있는 것 같나요? 이미 오랜 실망이 쌓여 마음이 닫혀버렸나요? 아직도 꿈꾸기에는 삶이 너무 버거운가요? 아니오. 저는 그저 함께 꿈꾸고, 함께 춤추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삶이 감격적인 것이기에, 그저 남들처럼 흘러가버리는 속물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새해, 함께 꿈을 꾸고 함께 춤을 춥시다. 주님의 말씀을 힘입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 절망의 시대 한복판에 예수의 마을을 이루고 새로운 희망을 살아냅시다. 역동적인 생명의 바람이 우리로부터 불어갈 것입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뛰어 드십시오. 숲은 신나게 춤을 추고, 물결은 더 넓은 꿈을 꿀 것입니다.         
(박현철 전도사)

2010. 1. 3 예수마을 청년부 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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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2) 2010.07.18

예수마을 교회 소개

  한국에는 교회가 많고, 서울에는 특히 더 많습니다.

  이 많은 교회들 중에서 봉천동 고개에 저희들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생각은 좀 다른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규모나 프로그램 보다는 사람을 아끼고, 키워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희 교회가 위치하는 지역은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심하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틈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교회를 이곳에 세워 이웃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 뜻을 품은 성도들이 함께 사는 “마을”을 이루고자 하는 꿈으로 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회, 이웃들과 함께하는 교회, 성도들과 함께하는 교회. 이것이 저희 예수마을의 세가지 정신입니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12년간 이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정신으로 시작했지만 100% 잘 실현하지도 못했고 큰 사업을 벌이거나 대단한 성과를 내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본받을만한 교회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만한 교회도 아닙니다. 저희는 다만 함께하는 정신을 잘 실천하여 사람을 살리고 키우며, 화해하고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희들을 통해서 예수 믿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잘 증거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는 청년들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교회 구성원의 절반쯤을 차지하는 젊은 교회입니다. 저희 예수마을 청년부는 치열하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찾아가는 모임이 되고자 합니다. 

  교회에 한번 왔다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함꼐 희망을 찾아가는 이 여행에 동반자가 되어 같이 걸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청년들을 사랑하고 도운 목회자들과  누구보다 열심히 청년기를 지나온 선배 성도들, 그리고 지금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또래청년들이 당신의 친구가 되어 함께 걷고 싶습니다.



2010. 5. 2 예수마을교회 청년부 봄날의 만남에 온 사람들에게 교회 소개하려 쓴 글.
이승장 목사님이 창립하실때 쓰신 예수마을 정신 소개글을 약간 편집하고 살을 붙였다.
좋은 정신이 좋은 몸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좋은 정신이라도 가져야 좋은 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난 참 좋은 교회에 다녔고, 다니고 있는 행복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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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교회  (1) 2010.05.03

책상 이야기

전임으로 일 하면서 좋은 것은 내 책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파트일때도 책상은 있었고, 뭐 늘 내 방에 책상은 있었지만
뭐랄까 사무실에 있는 내 책상은 왠지 중 2때 교실에 생긴 사물함 처럼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렇게 "내 것"을 갖는다는 것은 책임감 한가지를 더 수반하는데
바로 "정리"라는 책임감이다.
정말정말정말 소원인데, 이 책임감은 좀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 정리 앞에서는 책임의 윤리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무조건 오우노. ㅠ

보라.

이것이 나의 책상. 그리고
이것이 내 옆자리에 앉으시는 목사님 책상.

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마냥 극명한 차이를 어찌 극복할꼬. ㅠ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목사님이 나를 이해해주신다는 것.
때때로 당신 자리에서도 어질러놓고 뭔가를 하고 있을때가 있는데, 
그냥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주신다.

하여간 오늘도 종일 뭔가를 하다보니 너무 어지러워서 조금 치웠는데도 이모냥이니
난 정리는 정말 "아이 짜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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